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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영화 줄거리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격 후 최한규(최규하) 과도정부는 정상호(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습니다.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광(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신군부세력이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상호가 김재규 내란에 방조한 협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한 것입니다. 12월 12일 저녁, 보안사 인사처장 하창수(허삼수), 육군본부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경사 제33헌병대 병력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정상호를 강제연행하고, 재가를 안 해주던 최한규 대통령은 전두광이 군 내 사조직(하나회)을 동원하여 최전선의 전방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이자 13일 결국 사후재가를 하게 된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13일 새벽 4시까지의 9시간의 사건들이 영화 서울의 봄의 줄거리입니다.
역사적 배경
원인
12.12군사반란은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 반란 사건으로,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후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갈등이 시작입니다.
전개
이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에게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강제로 연행하기 위해 일부 육군장성들을 요정에 초대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지휘권을 무력하게 합니다. 연회 도중 정승화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 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습니다. 정승화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정병주와 장태완은 수도권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대응하려 하였지만,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던 노태우의 9사단을 끌어들이며 대처하였습니다. 결국 신군부는 정병주와 장태완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며 반란 진압군은 무력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崔圭夏)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국방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거절당하였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국방장관 노재현(盧載鉉)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습니다.
결과
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전두환은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렀고, 노태우 역시 대장, 내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이밖에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12·12 군사반란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군정으로 회귀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국민과 정치인이 저항 운동을 펼쳤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5·18 민주화운동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총평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기에 결말을 알고 보았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와 훌륭한 각본, 긴장감을 주는 심리전과 캐릭터들의 상황적인 해석을 잘 풀어내어 2시간 20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잡한 근현대사를 잘 모른다고 재미가 없거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까 걱정하며 볼 필요 없게 내용이 시간상으로 잘 정리되어 풀어져있습니다. 결말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지휘부의 한심한 대응으로 놓쳤다는 답답함과 그런 무능한 위정자로 인해 성공한 쿠데타가 다시 민주화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희생되었는지 아는 불편함을 뒤로하고 하나회의 멤버들이 국가 요직에 올랐음을 한 명 한 명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몇 번 보아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